‘뉴질랜드’라는 나라

나는 철없던 십대시절 한국을 떠났다. 우선 당시 다니던 학교가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가 첫번째 이유고 , 그 다음으로는 오랫동안 미군부대에 근무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꼬꼬마 시절부터 서양문화, 특히 영어에 엄청나게 관심이 많았던 이유 등이 있겠다. 원래는 성인이 된 후 가족과 뉴질랜드로 다함께 이민을 갈 예정이었으나, 본인이 기질적으로 아직은 온순하던 그때까지는 별다른 사고를 친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시절 엄청나던 유학 붐이 원인이었을까, 부모님께선 결국 어찌어찌 나만 먼저 혼자 보내기로 결정하셨다. 느닷없이 혈혈단신 외국에 나가 산다는것에 대해, 솔직히 뭐 불안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 기뻤다! 어찌됐든 왠지 낭만적이고, 뭔가 인생이 엄청나게, 그리고 멋지게 바뀔거라는 기대감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다니던 학교 뒤에 있던 농장에서. 도착한지 이틀 후에 찍은 사진이다. ‘뉴질랜드’ 하면 양이라던가 소라던가 하옇튼 ‘자연’의 이미지 밖에 없었는데, 그 시절 살았던 오클랜드가 번화한 도심이라서 그런지, 이 날 이후 농장 등은 전혀 보질 못하고 살았던거 같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식물들. 뉴질랜드는 지리적으로 오랫동안 다른 나라들과 분리되어 있었던 탓에, 그 나라만의 특이한 고유종이 참 많다.

도착한 첫날부터 나는 고교 기숙사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기숙사 교감이셨던 선생님 부부는 무려 공항까지 마중을 나와주시는 친절을 베풀어 주셨다. 두 분은, 아직 영어가 미숙하던 내가 알기 쉽도록 천천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고, 내가 매고 있던 가짜 아이바네즈 기타에 관심도 보여주시는 등, 불편하지 않게 참 여러모로 많은 배려를 해주셨다. 다만, 문제는 바로 기숙사 아이들 이었다! 그 곳은 한국으로 치면 중1부터 고3까지, 남자애들만 정확히 100명이 함께 모여 사는 곳 이었는데, 현지놈들의 텃새도 물론 적잖이 있었고, 무엇보다 사소한 일상생활 속의 습관에서부터 별의별 문화의 차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거의 매일 적잖은 충격을 받곤 했었다. 지금이야 한국이 여러모로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자국 국민들조차 ‘아직 멀었다’고 인식을 하던 그런 시대 였기에, 나는 무조건 ‘선진국’ 뉴질랜드인들의 방식이 모든면에서 우월하며 앞서 있다고 믿고, 무작정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는거다!

해안선이 많고 대기오염이 거의 없어 먼 산과 구름, 특히나 밤에는 별도 매우 잘 보이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더라면 이런 모습은 말도 안되지. 그런데 용모야 복장이야 어떻든, 학생은 학생으로써 일단 공부만 제대로 하고 있다면 특별히 학교가 참견을 하는 일 따윈 없었다.

뉴질랜드는, 남녀노소 할것없이 대부분 스포츠에 너무나들 열심인 그런 나라였다. 럭비야 뭐 두말하면 잔소리, 워낙 강국이다 보니 사람들이 관전하는 것도, 직접 하는것도 진심이더라. 한국에서는 그저 음악이나 듣고 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지내던 나는, 뉴질랜드에 간 후부터 스포츠를 본의 아니게 많이 접하고 또 그만큼 활달해 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역시 근육!’이라는 마초이즘의 개념도 머리 속에 자리 잡았으며, 스포츠란, ‘꼭 잘하지 못하더라도 여럿이 함께 모여 즐기는 것’ 이라는 건전한 느낌을 많이 받던 기억이 난다. 내겐 아직 생소하던 럭비의 스킬이 좀 부족하더라도, 일단 모두 다같이 진흙탕에서 뒹굴어가며 함께 뛰다보면, 생긴건 우락부락하고 거칠던 놈들이라도 ‘오늘 플레이 참 좋았다’며 말을 걸어와, 금새 많은 친구들을 사귈수 있었다.

당시 다니던 뉴질랜드의 학교를 한국과 비교해 보면, 정말 너무나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학생이 숙제를 안해가도 선생님들이 검사를 안하고, 시험성적이 안 좋은 애들도 꾸짖기는 커녕, 진로를 걱정해 주는 일 조차 없었다. 왜냐고? 숙제를 제대로 하는것도,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하는것도, 결국은 다 학생 본인들이 해야할 일이고, 각각 알아서 책임져야 될 본인들의 미래니까. 교사들은 직업명 그대로 ‘가르치기만’ 하고, 그 외 한국에서 항상 듣던, 뭐 예를 들어 ‘운동을 하자, 우유를 마시자, 청소를 하자’ 등, 수업과 직접 관계없는 잔소리들은 일체 들을수가 없는 나라였다. 학생이 감기로 학교에 오지 않아도, 집에 전화를 해오는 일따윈 없었다. 왜냐면 학생이 학교에 오고 마는것 조차 학생들의 결정이고, 무엇보다 학교는 병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생 한명,한명의 개인사를 일일이 걱정을 해준다한들, 병이 낫는 것도 아님은 물론, 그런것들은 오히려 그냥 ‘오지랖’이라는 개념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와…이 나라 좀 너무 냉정한거 아닌가?’ 라고도 생각했으나,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뉴질랜드인들이란 부당한 일에 처한 사람이나, 쌩판 모르는 사람이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으면, 몸을 사리지 않고 즉각 반응하며 도움을 주는 사람들 이었다.

뉴질랜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국계 백인들. 내 눈에 비친 이 백인들이란, 기본적으로 타인을 대할때 남녀노소 관계없이 ‘참견할 일과 참견 안할 일’의 구분이란게 확실했다. 나는 당시 아직 성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 ‘잘사는 나라’ 란 사회의 여러 분야의 구석구석이 ‘중요한 일과 쓸데없는 일’을 기준으로 움직인다는 점, 또한 국가의 룰이나 시스템이 복잡하거나 모순되지 않고, 단순히 옳고 그름에 기초해 맞물려 돌아간다는 점 등을 깨우쳤다. 즉, ‘매사 철저히 효율 비효율은 따지되, 곤란한 사람은 일단 돕고, 불의나 불평등에는 주저없이 맞선다’ 는 그들의 사고방식이야 말로, 선진국의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받아들일 점이라고 굳게 믿었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 날, 생물 시간의 일이었다. 내가 어느 정도 영어에 자신이 붙어 약간 기고만장 했을 시기. 그 날의 수업 내용은 ‘유전’에 관해서 였는데,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킥킥대며 선생님께 물었다. “인간의 정자를 강제로 여성에게 수정시키면, 돼지인간이 태어나는 건가요?”. 당연히 곧바로 핀잔 듣기를 각오하고 있던 나에게, 선생님은 ‘아주 좋은 질문’ 이라며, 너무나도 진지하게 유전학적으로 왜 ‘돼지인간’이 성립할 수가 없는지를, 땀까지 뻘뻘 흘리시며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나는 약간 당황하다가, 이윽고 곧 자세를 고쳐앉아 선생님의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귀에 쏙쏙 들어왔고,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공부라 느꼈다. 동시에, 한국에서 배우던 것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물이 따듯한 바다에서는 삼치가 많이 잡힌다’, ‘폴리염화비닐수지를 이용한 가죽대용품’ 등등, 영문도 모른채 무조건 달달 암기만 하던 그 시절이 떠올라, 아주 많이 비교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나는, 그런 잡학들에 반항해 선생님에게 대들기도 했었다. “삼치 같은거야 우리들이 몰라도 어부들이 잡아주잖아요, 그리고 가죽대용품에 쓰이는 플라스틱이 어떤 종류인지는 또 왜 알아야 되나요?” 당연 펄펄 화들을 내셨다. ‘그런건 따지지 말고 무조건 알아야 하니까 가르치는 거’라고. 이런식으로 나는 그냥, 무조건 한국이 안 맞았다…

대학시절 또한 역시 도저히 잊을수가 없는, 내 삶에 있어 아주 큰 의미를 가지는 중요한 시기라고 하겠다. 일단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아이들은 각자 진로에 대해 진심이었다. 허나 그것이 다들 대학에 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평소 머리 터지게 놀기만 하고 성적이 안좋았던 아이들은, 미리 그것을 인정하고 졸업과 동시에 본인들 하고 싶은 직종에 취직을 일찌감치 해버리더라는 것. 굳이 대학에 가려고들 하지를 않았다. 대학에 가는 아이들도 대부분 그 즈음엔 출가를 하여, 학비는 정부가 관할하는 무이자 학생론으로 충당하고, 셰어하우스 등에서 살며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면서들 지내더라. 애시당초 뭐 서로 학교는 어디 다니고, 누구는 잘 나가고, 그런 비교를 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공부머리가 없던 학생들이라 치더라도, 예를 들어 건설업에 쫄짜로 일단 뛰어들어서, 4년제 대학 다닌 애들이 졸업할 때에는 이미 내집 마련을 했거나, 벌써 결혼도 해 가정을 꾸민 경우를 나는 종종 보았다. 이처럼 뉴질랜드는, ‘성공을 향한 인생설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같은 어떠한 공식이 정해져 있는 나라가 아니라, 어떻게든 본인들이 알아서 일단 일만 부지런히 하면 대부분 남부럽지 않는 삶을 살 수는 있는, 그런 나라였다. 누구를 만나서 연봉이 어쩌고, 차림새는 저쩌고, 비교를 해본들 결국 별 차이가 없기에, 신분상승이나 엘리트의식의 개념이 극단적으로 희미했다. 물론 뉴질랜드도 흔히 말하는 ‘사’자 들어가는 사람들이 당연히 훨씬 더 나은 삶들을 살지만, 중요한 것은 꼭 그러한 직업군이 아니더라도, 노력만 하면 한 만큼 어느 정도의 삶은 어쨌든 보장되는 나라였음은 확실하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대학시절이 그저 너무나도 자유롭고 시간적 여유도 많았기에, 여러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엄청나게 다양한 경험들을 했다. 미래의 대한 부담이나 걱정 따윈 없었다. 만약에 내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더라면 어땠을까. 과연 토론이나 질문은 제대로 할줄은 아는, 자기주도적 인간이 될 수는 있었을까? 아마도 그냥 계층 재생산 도구인 ‘좋은 대학가기 경쟁’의 희생양이 되버리진 않았을까? 물론, 어마어마한 사교육 뒷받침이 튼튼한 한국교육의 높은 수준과 집중력, 몰입력은 큰 강점이지만, 삶의 질이나 자기탐색 면에서는 뉴질랜드의 교육이 더 우월하다고,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알바에 매진하다

뉴질랜드 학생들의 아르바이트는 근무조건, 문화인식, 임금, 학업과의 균형 면에서 한국과 크나큰 차이를 보인다. 일단 근무시간이 학기중에는 주 20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업과의 병행이 가능했다. 한국처럼 생계형이라거나, ‘취업 스펙’과는 분리된 인식이기 때문에, 대부분 단순 노동이 아닌 ‘실무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본다. 나는 매스미디어나 음향기술의 둘중 하나로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메인으로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광고녹음 보조를 하면서, 방학때에는 추가로 잔디깎기나 수퍼마켓 정육 코너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진로경험과 자기개발의 일환으로 나는 매우 바쁜 나날들을 보냈으며, 사회인이 되기 전에 벌써 근무현장의 실전영어나 분위기 등을 익힐 수 있었다. 한국의 아르바이트는, 그 경험 자체보다 대외활동, 인턴, 자격증 등이 사회에서 더 중요하게 평가받는다는 점에서, 진로와 연결된다기 보다는 그저 현실 노동에 가깝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뉴질랜드 시절, 나는 친구들이 참으로 많았다. 결코 일부러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같은 한국출신 들은 왠지 현지에서 사귀기 힘들고, 백인 아이들이 나와 금방 친해졌다. 고등학교때 같은 학교에 있던 한국학생들은 한마디로 나를 ‘띠꺼워’했다. 그것도 그럴것이, 본국에서는 ‘Ref’나 ‘솔리드’ 같은 그룹들이 뜨던 그 당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시끄러운 전기기타를 치는 나는 괴짜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도 한국가요는 좋아했다! ‘룰라’ 테잎도 가지고 있었고, ‘서태지와 아이들’도 존경했었다. 단지 찢어진 청바지의 내가 힙합바지의 본인들과는 외모가 틀리다고, 그리고 내가 본인들이 아닌 백인들 이랑만 몰려 다닌다고, 나를 멀리들 하는것 같아 좀 서운하기도 했었다. 뭐 내 머리속에는 그저 ‘그래, 뭐 말섞기 싫으면 섞지마, 어차피 혼자 온 내가 잃을게 뭐냐. 아니 여기가 뉴질랜드니까 뉴질랜드 애들이랑 다니는건데 그게 어디가 이상하다고?’ 라는 생각뿐이었다.

뉴질랜드 아이들은 학업의 스트레스가 거의 없이 자유롭게 지낸다. 또한 한국 아이들에 비하면 다소 거칠게(?) 자라기 때문에, 대개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자립심도 강한 편이던 것으로 기억한다. 행동에 거리낌이 없고, 장난도 심했으며 순진했다. 원래가 경쟁이 없는 나라여서 그런지, 성격들도 전반적으로 여유롭고 매사를 즐기려는 경향이 강했다. 멋진 옷, 고급 브랜드 등을 가게에서 팔거나 흔히 말하는 ‘FLEX’ 같은것이 존재하는 나라도 아니었거니와, 집이 부자라고 하더라도 수수한 차림새들 이었다.

나의 절친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거의가 영국/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즈 등 ‘그레이트 브리튼’의 후손 백인들 이었는데, 호의적이면서도 느슨했다. 주말을 즐겁게 보내는 일에 필사적 이었으며, 세세하고 꼼꼼한것, 골치 아프고 복잡한 것들은 무엇이든 멀리 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한국과는 달리 거의 매주 금,토요일 저녁에는 동네마다 꼭 누군가가 파티를 열어 쌩판 모르는 사람 집에 가서는, 그저 먹고 마시고 친구 만드는 일들을 즐겼다. 나도 20대때에는 하루밤에 파티만 서너건, 여러집을 돌아다니며 쳐들어가 재미있게 놀곤 했다. 대부분 기본적으로 음주가무를 즐기고, 특히 남녀노소 관계없이 하드록 계열의 음악을 좋아했다. 럭비는 말할 필요도 없고, 크리켓이나 수구 등, 한국에서는 약간 생소한 스포츠들도 많이들 즐기더라. 재미있는것이 바로 옆나라인 호주에 대해서는 묘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어, 은근 이것저것 비교를 하거나 욕도 하는 분위기였고, 나같은 동양인들을 처음 만나 사람을 대할때도, 일단 영어가 통하면 바로 ‘본인들과 같은 부류’ 라는 느낌으로 대해줬다. 특이한 점은, 모두가 과도한 자유는 누리되 ‘자제력’들은 없었는지, 청소년들의 자살율과 임신율이 상당히 높았고 알콜중독, 마약문제 등도 동시에 아주 심각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의 첫 여자친구가 뉴질랜드인 (키위) 이었다. 뭐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첫사랑이기도 하고 만나게된 계기도 참 괴팍스러워, 지금이야 빛은 많이 바래졌어도 젊은시절 추억 속의 한구석은 차지하고 있다. 첫만남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파티 외에도 내가 주말에 즐겨가던 클럽이 하나 있었는데, (흔히 한국에서 말하는 ‘나이트’ 같은 곳이었지만, 주류판매는 안하고 고등학생들도 입장이 가능한 그런 곳 이었다) 그 곳에서 여친을 만났다. 어느날 밤 나는, 여느 때처럼 친구들 5,6명과 우루루 몰려가서, 그날 ‘물’을 곁눈질로 살피며 말도 안되는 엉터리 댄스를 시전 중 이었다. 때마침, 우리들 옆에도 걸들이 한 5,6명이 원을 만들고 열심히들 춤을 줘대고 있더라. 그런데 그 중 한명이 유독 내 눈에 띄길래, 나는 원 안을 가로질러가 걔 손을 잡아 뒤쪽으로 데리고 나왔다. 둘이 음료수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해해거리며 나눠보니, 애가 외모는 내 타입은 맞는데 좋아하는 것등, 취미가 좀 안 맞는것 같았다. 결국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하는 일따윈 없었지만, 서로 뭐 그래도 기분좋게 같이 놀고, 그날은 그냥 그렇게 헤어졌다.

바로 그 다음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일요일 이었는데 (젊어서 힘은 남아돌고), 밖은 그렇다고 또 비가 쏴아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아예 안 내리는 것도 아닌 , 그런 미묘한 날씨가 갑갑하던 바로 그때! 전화가 울렸다. 받아보니 처음 듣는 여자 목소리 였다. ‘아니 어제 전번까지는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 뉘슈?’ 라고 생각하고 눈을 껌뻑이며 물으니, 자기가 어제 클럽에 나랑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 ‘어? 어제 걔는 이런 목소리가 아니었던거 같은데…하긴 음악 소리가 워낙 시끄러웠어. 평상시에는 이런 목소리인 갑다’ 하고 일단은 반가웠다. 시시콜콜 수다를 떨다보니, 나한테 지금 좀 나올 수 없냐고 하더라.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라 나갔다. 장소는 당시 살던 오클랜드에서 유명하던 어느 음반가게 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니 뭐 한번 만난적도 있고, 둘이 뭐 연인관계 까지는 발전 안할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냥 거지같이 입고 주머니 양쪽에 두손을 찔러넣은채 쓰윽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휘익 둘러봐도 걔가 안보이길래, 뭐 좀 늦나 보다 하고 중고CD 코너에서 기웃거리는데, 뒤에서 아까 전화 속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응? 어” 뒤돌아보니, 생전 처음 보는 여자사람 이었다! ‘누구시냐’ 뭐 굳이 말을 안해도 이미 크게 떠진 내눈이 그리 묻고 있었다. ‘본인 이름은 뭐뭐고, 어제 클럽에서 너를 봤는데 관심 있다’ 라는 것이었다. ‘내 이름이랑 전번은 어찌 알았냐?’ 물으니 ‘니가 돌아간 후, 남아서 놀고 있던 니 친구가 가르쳐줬다’는 것이다. 흐음… 음…얘기를 들으며 (위아래를 연신 훑어봄) 머리를 굴려보니, 일단은 나라는 사람한테 관심을 가져준 것이 고맙고, 또 파란 눈에 통통한 것이 아주 이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귀엽더라! 그래서 느닷없이 의기투합, 그날 식사도 하고 영화도 보고 드라이브도 하며, 재밌게 놀면서 우리는 커플이 된다.

그리하여 총 6년을 사귀고, 첫사랑이란건 여러분들 모두가 그랬듯이 나 역시 책 한 권을 펴내도 될만큼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다만 이번 글에서는 이 첫사랑이 주제는 아니므로, 앞으로 요청에 의해 더 자세히 쓸 의향은 있다. 어쨌든 그 시절 그녀에게는 진심으로 ‘나의 청춘을 다 바쳤었다’ 라는 말씀만 드리며,여친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락을 짓겟다.

아르바이트 이야기는 위에서 한번 언급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뉴질랜드를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일했던 회사에 대해 적어보겠다. 일단 업종은 미디어 프레스/레코딩 스튜디오 이고, ‘S’로 시작하는 뉴질랜드의 음악팬이라면 다들 한번씩 들어는 봤을 법한 그런 회사였다. 나의 일은 계약관계에 있는 미국의 음반사에서 아티스트의 마스터 음원을 아날로그 테입이나 디지털 파일로 받아, 그것을 광학 디스크용 유리기판에 레이저로 새겨넣은 뒤, 전기 도금을 통해 그것을 다시 니켈 스탬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니켈 스탬퍼를 당시 회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게 자리하던 공장에 넘기면, 프레스 공정으로 인해 그것들이 음반점에서 파는 CD,DVD,Blu-ray가 되었다. 각설하고, 나는 그 일이 무조건 좋았다! 아직 유튜브나 스포티파이가 생기기도 전, 시중에 깔리기 전의 여러 최신 신보들을 누구보다 빨리 내 자리에서 직접 접해 볼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 항상 음악을 틀어놓고 음악속에서 일을 한다는 점도 너무 좋았다. 나는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해 본적이 없지만, 한국 드라마에서 비춰지는 모습들이나 가끔씩 서울 사는 친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로 유추해 보건대, 뉴질랜드 야말로 ‘워라밸’이 보장되는 나라가 아닌가 싶다. 뉴질랜드는 꼭 그렇게 ‘아등바등’ 매일매일을 정신없이 보내거나, 경쟁을 해야만 살아남는 나라가 아니다. 한국처럼 퇴근후에 이런저런 밤문화를 즐길만한 곳이 애초에 없기도 하거니와, 대부분의 뉴질랜드인들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단란하게 집에서’ 의 시간을 엄청 중요하게 여긴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것이, 주말을 얼마나 재밌게들 보냈는지, 당시 회사동료들이 월요일 아침이면 죄다 피곤에 쩔어 있었으며, 또 한주일이 시작된다는 것이 불만인지 표정들도 어두웠다.그나마 화요일이 되서야 다들 정상적으로 일 다운 일을 했으며, 무려 수요일부터 (내일 모레부터 주말이 시작한다는 기대감에) 들뜨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목,금이야 이미 마음이 ‘주말모드’이기 때문에 제대로들 업무처리가 안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런 사람들 5백만명이 모여 사는 나라, 뭐든지 그닥 빡세게 하지 않아도 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나의 기억 속 뉴질랜드다.

뉴질랜드는 화려하거나, 자극적이거나, 남의 삶을 부러워 하거나 설령 뽐낸다 하더라도 부러움을 사는 나라는 아니다. 한편, 마음의 여유와 소박한 행복이라는 것은 분명히 보장되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제 그런 뉴질랜드에 더이상 살고 있지 않다. 더 늦기 전에 다른 곳에서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서, 지금은 또 일본이다. 해외이민에 대해 흔히 ‘사람사는 곳 다 똑같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 라고들 하시는데, 나는 은퇴후에는 역시 한,뉴,일 중에서 뉴질랜드를 택해 거기서 천천히 남은 인생을 보내고 싶다. 뭐랄까, 가장 인간이 ‘인간적으로, 있는 그대로’ 지낼 수 있는곳이 뉴질랜드 인거 같다. 젊고 피끓는 나이라면 욕심을 내어 다른 나라에서 열심히 일을 한뒤, 노후를 뉴질랜드에서 유유적적하게 보내는 것도 참 멋지다고 본다.

추억이 방울방울

최근 수년간 뉴질랜드는, 경제가 해마다 위축되어 그에 따른 성장률도 굉장히 낮다고 들었다. 실업률도 곧 아시아 태평양 최고 수준이 될것이고 순 이민자수가 많이 줄었으며, 특히나 예전에는 별로 없던 자연재해에 의한 피해소식 등도 이제는 자주 듣게 되는데, 뉴질랜드의 시민으로써 가슴이 참 아프다. 어찌됐건 나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아주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것이 사실이고, 지금같은 글로벌 시대에 세계를 보는 눈을 뜨게 해줬던 나라가, 바로 뉴질랜드니까. 한국에서 그저 얌전히 중학교를 다니며, 지극히 평범하게, 마치 개미같은 삶을 살아가던 나를, 완전히 바꾸어 세계 어디서나 당당히 삶에 맞설 수 있도록 가르쳐준 점에 대해서, 나는 뉴질랜드를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개방적이고 항상 웃던 사람들! 안전하던 밤길! 온화하던 날씨! 모두모두 그립다. 나 자신은 비록 이제 나이를 먹었지만, 아직도 뉴질랜드라는 나라는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젊고, 가능성도 아직 많다고 본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 중에서, 가끔은 인생을 좀 천천히 살아보고 싶으신 분들은 언젠가 꼭, 이 뉴질랜드라는 나라에 한 번 가보시기를 바라면서, 두서없는 긴 글을 마친다.

1 COMMENT

ジョン

저는 일본이 싫어서 뉴질랜드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데…J님은 그 반대 이신가 보네요?

返信する

Comments댓글コメント